[가스신문=김재형 기자] “30년 전에도 LPG판매업을 영위하다보면 과도한 규제는 물론 정부의 고시가격 제도 등 풀어야할 숙제가 산적했습니다. 당시에는 이화성 회장이 이끌고 있던 자율적 전국 조직인 한국LPG판매업중앙회가 있었지만 공인단체가 아니다보니 공동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구가 없어 어려움이 컸죠. LPG판매업의 발전을 위해 지난 1988년 한국LP가스판매업협동조합연합회가 구성됐고 저는 한해 앞서 준비위원장을 맡으면서 연합회의 초대 회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됐습니다.”

한국가스판매업협동조합연합회 박찬목 초대 회장(75)은 LPG판매업에 40년 넘게 종사하면서 역사의 산증인으로 불릴 만큼 족적을 남겼다. 박 회장은 가정·상업용으로 프로판의 쓰임새가 확대되는 것을 보고 1978년 강남구 논현동에 소재한 영동가스를 인수하면서 가스업계와 인연을 맺었다.

“경험 없이 사업을 시작하다보니 초기에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이전에 중앙일보 지국장을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수요개발에 나서 일 년 만에 판매물량은 3배 가까이 늘렸죠.”

박찬목 회장은 당시는 LPG의 성장기로서 전국에 4700여개의 판매업소가 있었으나 이를 대표하는 전국 단위의 공인단체가 없다보니 사업자들은 다양한 애로사항을 겪었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이에 중소기업협동조합을 구성하자는 여론이 형성됐으며 박 회장은 당시 강남구 지회장을 비롯해 서울 남부 이사장 등을 수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1988년 한국가스판매업협동조합연합회 초대 회장을 맡았다.

“제가 연합회 회장을 맡은 것은 당시에도 LPG판매업이 영세성을 면치 못하다보니 사업자들이 하나로 뭉쳐 이를 극복하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예를 들어 고시가격 시절에 정부는 충전사업자단체와 회의를 통해 가격을 정하고 이를 판매사업자에 통보하는 식이었습니다. 소비자들과 직접 만나는 판매사업자들은 정부정책에서 소외돼 있던 것이죠.”

박 회장은 가스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는데 가스업계의 정보를 다루는 업계소식지가 없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에 언론매체의 필요성을 느껴 1989년 5월에 가스신보(가스신문의 전신)를 창간했으며 발행인을 맡았다. 당시 LPG뿐만 아니라 도시가스, 고압가스, 가스기기 등도 동반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체 가스업계를 아우르는 가스종합 매체로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곧바로 경영권을 가스신문 양영근 발생인에게 양도했다.

박찬목 회장은 LPG물량이 감소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1996년 강남구를 공동화사업장으로 변화시켰고 한국가스안전공사에서 견학할 정도로 대성공을 거뒀다. 다만 이후 건강문제가 생겨 일선에서 물러났으나 2008년 연합회 회장을 맡아달라는 주변의 요청을 수락하면서 다시 한번 연합회를 이끌게 됐다. 그때 판매사업자들의 위상을 한 단계 향상 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연합회가 태동한지 20년이 흘렀으나 별다른 발전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사무실도 너무 열악한 곳에 위치해 있어 한국가스안전공사를 설득해 서울지역본부 3층으로 이전하고 판매업의 지속가능 성장을 위해 연구용역도 발주했습니다. 당시 판매협회는 천덕꾸러기 이미지가 있었는데 이 같은 일을 계기로 큰 변화가 시작됐습니다.”

다만 당시 도시가스 보급에 LPG판매사업자들의 불만이 고조되면서 정부종합청사가 있던 과천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첫날 그는 스트레스로 인해 담도가 막히는 큰 수난을 겪었다. 다행히 긴급수술로 위기를 넘겼지만 연합회 회장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LPG판매업 발전을 위해 노력했지만 미진한 부분도 있어 아쉬움도 큽니다. 1세대 판매사업자들의 노력을 바탕으로 2세대, 3세대 판매사업들이 체적거래, 벌크공급 등 LPG판매업을 더욱 업그레이드 시키고 있어 참으로 뿌듯합니다. 국내 에너지산업은 정부의 정책에 좌우되고 있지만 친환경적이고 재난 시 대응이 빠른 LPG의 육성책을 정부가 지속 마련해 주길 희망합니다”라며 30년의 소회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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