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회 변리사
성창특허법률사무소 대표
전 변리사회 회장

지난 20대 국회 4년 동안 발의된 법안은 모두 24,000여 건. 그중 본회의를 통과해 진짜 법이 된 건 35% 정도이고, 나머지 15,000여 개 법안은 국회에 계류된 상태였다고 한다. 20대 국회가 끝나면서 이들 법안이 모두 폐기됐다. 이들 법안 가운데는 정치권이 처리를 약속했던 법안도 수두룩하고, 이른바 '구하라법'은 국민 10만 명이 입법청원에 동의한 법안인데도 폐기됐다(그리고, 다시 제출했다고 한다). 법을 새로 만들거나 고쳐야 할 것은 21대 국회에서 다시 법안을 내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국회의원 임기가 끝나면 법안이 자동으로 폐기되는 제도는 정상일까? 법안은 내기부터 힘들다. 정부야 법안을 추진할 조직이 어렵지 않겠지만, 기업이나 민간단체 또는 개인은 제도를 개선하려면 보통일이 아니다. 먼저 국회의원을 설득해야 한다. 10명 이상이 발의해야 하는데 시작부터 쉽지 않다. 법안이 제출되더라도 수많은 회의와 관련자의 의견을 조율하는 것과 같은 절차를 거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런데 이런 법안들이 본회의에 가기 전에 국회의원 임기가 끝나면 그동안 거쳐 온 일이 헛일이 된다.

들인 시간과 돈은 우리 사회의 비용이다. 법률안 1건을 진행할 때 들어가는 비용(법안 준비, 전문위원 검토, 상임위 법률소위원회 검토, 상임위, 법사위, 본회의)은 정말 만만하지 않다. 대략 1억 원 정도로 계산하면 1.5조 원이 허공으로 날아가는 셈이다. 그에 따른 기회비용까지 계산하면 실로 엄청난 손실이다.

국회 임기가 끝날 때마다 자동으로 폐기해야 할까?

대부분 정책은 연속성이 있다. 정권이 바뀐다고 이전에 이어오던 정책을 폐기하면 혼란스러울 뿐만 아니라 투입한 비용은 잠겨버리는 경제적인 손실도 많다. 특별히 상황이 바뀌지 않았다면 이전 정책을 이어 가는 것이 기본일 것이다.

법안도 마찬가지겠다. 국회의원 임기가 끝난다고 이전 회기에서 필요했던 법안이 필요 없어질 이유는 없다. 길게는 4년여 동안 곡절을 거치며 법사위까지 갔지만 본회의에 가지 못한 법안이 있을 때, 국회 회기가 바뀌었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 타당한가?

자동 폐기를 규정한 근거를 찾아보니 헌법 제51조에 ‘국회에 제출된 법률안 기타의 의안은 회기 중에 의결되지 못한 이유로 폐기되지 아니한다. 다만, 국회의원의 임기가 만료된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라 규정돼 있다. 헌법의 기본 정신은 회기가 바뀐다고 하여 법률안이 폐기되지 않는 것이다. 헌법의 기본 정신을 이어받고, 현실에서 문제를 푸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필자가 일하는 변리사 분야에서, 변리사법 개정안도 각 국회 임기마다 법안이 제출되어 험난한 길을 걸었다. 상임위 법률 소위에서 변호사 출신 의원 1∼2명에게 막히고, 상임위를 통과해도 법사위에서 멈춰서고, 그러다가 의원 임기가 끝나면서 법안이 스르르 없어졌다. 새 국회가 시작할 때마다 모든 법안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 이게 정상인가?

법안 가운데에는 계속 추진할 가치가 없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것보다는 정말 필요해서 발의한 것이 더 많을 것 같다. 그런 법안을 단지 의원 임기가 끝났다는 것으로 모조리 폐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해결책을 찾아야겠다.

새 국회가 시작되면 각 상임위에 걸려 있던 법안에 대하여, 그 상임위원회 의원들 가운데에서 법안 추진을 이어받을 의원을 찾으면 어떨까? 자기 소관위원회에서 고민하던 법안이니 나 몰라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제출된 법안은 국회 임기가 달라지더라도 계속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기간을 정해서 임무를 이어받을 의원을 적극 모으고, 그래도 이어받을 의원이 없으면 그때에는 폐기하는 방식으로 처리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스 신화에 시시포스 이야기가 있다. 시시포스는 아래로 다시 굴러떨어지는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으로 끊임없이 밀어 올리는 벌을 받는다. 그는 끝없이 효과도 없는 노력을 되풀이한다. 우리 국민에게 이런 가시밭길, 걷지 않아도 될 길을 좀 줄여줘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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