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선거철마다 색깔론이 제기됐다. 색깔론이 소모적 논쟁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정치인들은 선거 때마다 이를 이용했고, 나름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러한 색깔론이 이제는 수소를 둘러싸고 나오고 있다.

수소가 재생에너지로부터 생산되면 ‘그린수소’, 화석에너지로부터 생산되면 ‘그레이수소’, 화석에너지로 생산하되 탄소를 포집·저장하면 ‘블루수소’, 원자력에서 생산되면 ‘핑크수소’로 편의상 구분한다.

수소생산이 아직 걸음마 단계이다 보니 현재 운영 중인 ‘신재생에너지 공급의무화제도(RPS)’ 내에서 다른 신재생에너지원과 비용 경쟁은 어려운 실정이다. 따라서 수소만 별도로 떼어내서 ‘청정수소 발전의무화제도(CHPS)’를 운영하자는 데에는 상당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고,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고자 작년부터 수소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문제는 ‘청정수소’의 범주를 정하는데서 발생한다. 작년 11월에는 ‘블루수소’가 청정수소에 포함돼서는 안 된다는 여당 내 반발로 수소법 개정안 통과가 무산됐다. 이후 산업계의 요청으로 한 발 물러서 ‘블루수소’까지 청정수소에 포함하는 것으로 여당 내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이번에는 ‘핑크수소’도 청정수소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야당의 반대로 올해 1월 수소법 개정안 통과가 또 다시 무산됐다.

정치권이 수소의 색깔을 가지고 논쟁을 펼치는 동안 에너지 산업은 투자기회를 놓치며, 수소경제로의 진입은 그만큼 지체된다. 수소의 가치사슬을 생산-저장·운송-활용으로 구분할 때, 현재 우리는 생산 부문의 논의에 갇혀서 대규모의 선제적 인프라 투자가 필요한 저장·운송 부문과 새로운 시장창출이 가능한 활용 부문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작년 11월 ‘제1차 수소경제 이행 기본계획’에서 2020년 0.22백만 톤에 불과했던 수소 공급량을 2030년 3.9백만 톤, 2050년 27.9백만 톤까지 확대할 것을 발표했다. 이 중 그린수소의 공급비중은 2030년 6.4%, 2050년 10.8%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블루수소를 통해 공급되어야 하나 ‘청정수소 발전의무화제도’에서 블루수소가 배제된다면 계획이 달성가능할지 의문이다.

풍부한 북해 풍력자원을 보유한 독일은 국가수소전략에서 녹색수소만을 강조하던 기존 입장을 바꿔 블루수소를 포함시켰고, 영국은 그린수소와 블루수소를 모두 포함하는 수소전략을 발표했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도 예산안에 블루수소와 핑크수소를 청정수소에 포함하는 등 주요국들은 블루수소를 그린수소의 불확실성을 해결할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그린수소가 우리가 지향해야 할 궁극적 목표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수소생산에 사용할 만큼 재생에너지가 풍부하지 못하고, 그마저도 다른 나라보다 생산단가가 2~3배 이상 높다. 해외에서 그린수소를 생산해 도입하자는 주장도 있으나, 액화 비용이 천연가스의 40배에 달하고, 에너지 밀도가 낮아 운송과 유통비용이 과다하여 경제성이 떨어진다.

수소경제의 안착을 위해서는 충분하면서도 안정적인 수소 공급, 저렴한 수소 가격이 선결조건이다. 다행히 우리는 정유 및 석유화학 산업에서 우수한 기술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해외 유전 및 가스전에 탄소포집을 할 수 있는 여건도 갖추고 있다. 그린수소가 충분한 경쟁력을 갖기 전까지 블루수소가 가교역할을 한다면 환경과 경제적 실리를 모두 챙길 수 있다. 정치권이 이념적 논쟁에서 벗어나 실리적 관점에서 청정수소를 바라보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 가스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구독신청